책소개
故김미현 평론가 1주기 추모 비평 선집
동시대 문학과 뜨겁게 호흡해 온
문학평론가 김미현의
다시 읽고 싶은 열 편의 글
김미현은 작품의 생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작가들의 평론가’이자 드물게 독자가 있는 평론가였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그의 글은 뜨거운 열정, 논리적인 전개, 박력 있고 문학적인 표현 등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균형 속에서 김미현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낳았다. 지난해 9월, 아직 이른 나이인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미현 평론가를 향한 그리움이 여전히 짙은 이유다.
故김미현의 1주기를 추모하는 비평 선집 『더 나은 실패』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서 시작되어 2020년대 포스트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그의 비평적 여정은 여성의 언어와 몸과 정체성에 뒤엉킨 환상들을 찢어내며 새로운 길을 터왔다. 그러면서도 그 비평적 여정은 유난히 경쾌하다. 이 특유의 경쾌함은 삶과 문학 모두에서 긍정과 부정을 단순히 나누지 않고 ‘부정 자체의 긍정’을 응시하는 힘에서 비롯된다. 강지희 평론가가 선별한 10편의 글은 김미현식의 ‘살게 하는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표 글이다. 더불어 그의 마지막 에세이 2편 및 인터뷰 등의 글을 함께 수록한 이 책은 김미현 문학의 생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것이다.
목차
서문 강지희 5
이브, 잔치는 끝났다 -젠더 혹은 음모 19
다시 쓰는 소설, 덧칠하는 언어 -패러디 소설에 나타난 여성 의식 56
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 -1990년대 소설 속의 성 83
불한당들의 문학사 -1990년대의 악마주의 소설 114
이브의 몸, 부재의 변증법 145
수상한 소설들 -한국 소설의 이기적 유전자 174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에게 207
주체의 궁핍과 ‘손’의 윤리 235
정의에서 돌봄으로, 돌봄에서 자기 돌봄으로 271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여성과 테크노페미니즘 -윤이형과 김초엽 소설을 중심으로 306
에필로그 341
더 빛나는 그림자 343
나‘들’의 문학‘들’ 346
암리타가 있는 키친의 풍경 358
출판사서평
한국여성문학사의 축약본
「이브, 잔치는 끝났다」는 한국여성문학사의 축약본이다. 식민지 시기 김명순, 김일엽, 나혜석에서 시작된 제1기의 여성문학, 1960~1970년대 활발하게 활동했던 박경리, 손소희, 강신재, 한무숙, 한말숙 등이 끌어갔던 제2기의 여성문학, 1980년대 중반 이후 불거져 나온 여성 문제와 함께 호흡했던 제3기의 여성문학 전체를 점검한다. 집약적인 정보로 이루어진 이 글의 매력은 마지막 결말부에 놓인 1990년대 여성문학에 대한 냉혹한 반성과 통찰에 있다. 주목과 잔치에 현혹되는 대신, ‘여성 문학은 얼마나 변하지 았았는가’ 경계하며 다시 묻는 데서 김미현 평론 세계는 시작된다. 「다시 쓰는 소설, 덧칠하는 언어」는 여성 패러디 소설을 통해 여성적인 언어의 존재 가능성을 탐색한다. 여성만을 위한 언어가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아이러니의 언어와 해체적 언어를 횡단하며 여성 정체성은 새롭게 탈구축될 가능성을 갖는다. ‘거울’이 아닌 ‘반사경의 언어’가 완성된다.
1990년대 문학에 대한 매력적인 진단
「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와 「불한당들의 문학사」는 1990년대 문학에 대한 매력적인 진단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적인 평론이다. 「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는 1990년대 소설 속의 성(性)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에 주목하며, 신세대 문학을 편견으로부터 구출하는 구제 비평의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를 주조한 진정성의 기원이 뜨겁고 불온한 정열의 정신성이 아닌, 무감정한 차갑고 가벼운 섹스의 육체성에 있다는 주장은 지금 보아도 신선하고 파격적이다. 이 글과 나란히 「불한당들의 문학사」가 읽힌다. 김영하, 백민석, 배수아의 서사에서 다채로운 성적 실천과 섹슈얼리티는 사회 전반의 권력에 대한 일종의 반란이자, 교감이나 정념이 표백된 채 심미적 주체성을 도모하는 방안이 된다. 두 글에서 주목하는 비정상적인 성과 악은 ‘미학적 부정성’의 형태를 띤 1990년대 문화정치적 저항을 정확히 짚어낸다.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에게
「이브의 몸, 부재의 변증법」에서는 오염되고 박탈되고 변이가 일어나기에 괴물로 취급되어 온 여성의 몸의 재현 양상에 대해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부터 에코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며 이론을 응용해 설명한다.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에게」는 가변적인 구성물로서의 젠더 정체성을 대표하기에 김미현의 평론에서 중요하게 위치했던 안티고네의 형상을 가장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며 기존의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으로 형질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날카롭게 포착한 글이기도 하다.
한국소설의 이기적인 유전자
「수상한 소설들-한국소설의 이기적 유전자」는 기존의 한국문학 비평이 잘 들여다보지 않은, 보수적인 대중성을 지닌 작품들의 세부를 분석함으로써 관성이나 추상화된 악을 문제 삼는다. 한국 소설의 ‘이기적 유전자’로 꼽힌 대상 텍스트들은 바로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김훈의 『남한산성』, 박민규의 『핑퐁』이다. 제각기 다른 세대를 대변하는 남성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한국문학에서 언제나 살아남는 이기적 유전자는 바로 강력한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라는 통찰에 이르는 과정을 보는 것은 짜릿한 경험이 되어 준다.
포스트맨(Post-Man) 시대의 윤리
「주체의 궁핍과 ‘손’의 윤리」는 ‘견고한 주체성과 당위적 윤리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이 글은 소설에서 ‘연대’ ‘용서’ ‘치유’와 같은 이상적인 윤리로 향하는 당위적 결론을 손쉽게 확인하는 대신, 이상적인 윤리의 수행이 현실에서 얼마나 불가능할 수 있는지 그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 ‘포스트맨(Post-Man) 시대의 윤리’를 말하는 이 평론은 2000년대 이웃에 대한 절대적 환대의 윤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기도 하다. 「정의에서 돌봄으로, 돌봄에서 자기돌봄으로」는 팬데믹 시대를 통과하며 다각도로 펼쳐진 돌봄 담론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다. 이 글은 돌봄에 헌신과 희생 등의 이상적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돌봄 윤리 내부에서도 긴장과 균열이 있음을 먼저 포착한다. 두 편의 글을 이어 읽으면, 외부의 규준에 따르던 이상적 윤리에서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는 긍정적 윤리로 거듭나는 과정이 읽힌다.
테크노페미니즘으로의 탐색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여성과 테크노페미니즘」은 한국 SF가 중흥기를 맞이한 2020년대에 더 널리 읽히고 인용될 선구적인 평론이다. 이 글은 윤이형과 김초엽 소설을 중심으로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여성이 ‘지구-되기’, ‘모성-되기’, ‘기계-되기’의 층위에서 어떻게 젠더 정체성을 찾아가는지 살펴본다. 이를 통해 완벽하고 절대적인 이상향으로서의 지구에 대한 향수나 복귀 자체가 환상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모성 또한 자연적이고 본질화될 수 없는 상황적이고 물질적인 문제임을 강조하며, 진정성의 아포리아를 보여준다. 여성과 과학 기술이 비관/낙관, 긍정/부정, 지배/억압 등의 이분법적이고 고정된 관계를 유지하기보다 흔들리며 새로운 정치적 미래를 탐색해나가는 ‘테크노페미니즘’은 기존 페미니즘을 산뜻하게 깨뜨린다.
작가의 말에서
문학에서 성공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실패만을 반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뮈엘 베케트의 다시 시도하기, 다시 실패하기, 다시 더 잘 실패하기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더 나은 실패’는 문학에서 엄청나게 위로가 되는 명제입니다. (…)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가 필경사가 되기 전에 했던 일은 우체국에서 ‘배달 불능 편지dead letter’를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배달 불능 편지란 수취인이 불명(不明)이어서 배달할 수 없는 편지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때 일어나는 문학적 반전은 배달이 가능한 편지가 오히려 해석이 완료된 ‘죽은dead’ 문학이고, 배달이 불가능한 편지는 아직 읽히지 않았기에 ‘죽지 않은un-deae’ 문학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배달 불능 편지는 전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른 누구에게 전달될 수도 있는 것, 그래서 새롭게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더 나은 실패’에 해당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오늘보다 더 낫게 실패하겠습니다. ‘오늘’의 그림자까지 담아내는 ‘내일’의 그림자 문학을 지향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둠이 보인다는 의미에서의 ‘그림자의 빛’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저자소개
저자 : 김미현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분으로 등단하여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계간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페미니즘 기반의 현장비평을 확장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저서로 『한국여성소설과 페미니즘』, 『판도라 상자 속의 문학』, 『여성문학을 넘어서』, 『젠더프리즘』, 『번역트러블』, 『그림자의 빛』 등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 현대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23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엮음 : 강지희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이며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하여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집 『파토스의 그림자』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