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학문의 본령과 학자의 자세
유학자들의 기준이 된 퇴계의 사유와 실천
창비 한국사상선 제5권 『이황: 조선 유학의 분수령』은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로 조선의 유학을 동아시아 전체의 교범으로 격상한 퇴계 이황의 글을 엮어낸 책이다. 이황은 한평생 주자의 학문을 주석하고 집대성하면서 당대 유학의 경향을 이끌었고, 그가 창설을 주도했던 서원들은 그의 사후 400여개로 늘면서 조선의 주요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했다. 조선 국왕을 비롯한 국정 지도자들에게 스스로 몸과 마음을 부단히 갈고닦을 것을 권하면서 군주와 사대부가 문교(文敎)의 정치에 매진할 것을 주문했다. 이로써 그는 조선의 유학을 연구와 실천 양면에서 한 단계 올려놓았고 유학이 조선 중후기의 통치이념으로서 완전히 자리잡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책에서는 이황이 남긴 글 가운데 이학의 전승과 확산을 위한 노력, 이학의 이론에 대한 성찰, 경세 방략, 생활의 경계 등을 엿보게 해주는 글을 위주로 선별·번역해 실었다.
■ 상세이미지
■ 목차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서문
문치를 향상시킨 이학의 한평생
핵심저작
1장 이학의 전승과 확산
심법의 전승 │ 주자 학문의 본령으로 가는 길 │ 주자 이후의 이학사 │ 심학의 지침
2장 이학 체계의 건축
마음의 구조와 수행의 요령
심성의 지도 │ 체용으로 본 마음 │ 정심의 맥락 │ 인은 안과 밖이 없지만, 내 몸에 가득 찬 어진 마음으로부터 확장하여 만물에 두루 미친다 │ 마음의 미발과 이발 │ 고요한 가운데 전일한 마음을 견지해야 한다 │ 고요함을 근본으로 세우고 경, 전일함으로 동정에 관통한다 │ 경, 전일함을 견지하는 방법 │ 경의 맥락과 견지하는 방법
양명학 비판
본심의 확립을 우선시하는 견해에 대한 비판 │ 정좌의 맥락 │ 인륜과 신체적 욕구의 차이
사칠논변
사단은 선하고 칠정은 선함과 악함이 정해지지 않았다 │ 사단과 칠정이 나오는 곳이 다른 이유
이에 대한 성찰
기는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이는 항상 존재한다 │ ‘물격’과 ‘이자도’의 의미 │ 이는 비어 있기 때문에 상대가 없다 │ 이가 움직이면 기가 따라서 일어나고, 기가 움직이면 이가 발현된다 │ 이에는 자체로 용이 있다 │ 이에 따라 외물에 응대할 때 마음은 비로소 공활하여 순응할 수 있다 │ 이는 지극히 존귀하여 맞설 상대가 없다
3장 출처와 학문 생활의 경계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의 기준 │ 기개를 가지고 학문으로 단련해야 시세에 흔들리지 않는다 │ 자신을 높게 생각하면 성취가 없고, 『심경부주』는 육구연의 학문이 아니다 │ 이황과 이이의 문답 │ 이의 체회는 일상에서 해야 한다 │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 진보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재단하여 향상할 줄 알아야 한다 │ 정좌에만 전념하면 안 된다 │ 격물과 성의 공부를 병진해야 한다 │ 이익은 옳은 것 가운데 있다 │ 임금의 현부가 아니라 도를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을 보고 진퇴를 결정한다 │ 선을 행하다 받는 비방은 감수해야 하고, 명성에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부 사이의 도리
4장 선현에 대한 평가와 전승
중국과 조선의 이학 전통 │ 조광조 선생은 시대의 사표이다 │ 도학에서 분발한 학문과 덕
5장 문치의 방략
왕정의 외교 │ 왕정을 위한 학문 │ 어린 선조에게 권고한 여섯 조목의 정책
6장 서원과 향약의 선도
백운동서원의 사액과 서원 제도의 확산을 건의하다 │ 조선시대 서원 학규의 전형 │ 예안에 동학들과 우탁을 향사하는 서원을 세우니, 서원은 선비가 소인이 아닌 군자로서 유자가 되는 곳이다 │ 이현보의 유지를 받들어 수립한 예안향약 │ 고법과 시속의 대립 │ 향당에서 자리 서열은 신분이 아닌 연령이 기준이다
7장 군자의 길
도산에 서당을 짓고 산림과 도의로 자신을 온축하다 │ 도산에 은거한 만은의 경계 │ 평소 변변치 않은 식견으로 자네들과 강론했었는데,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네 │ 근심하는 가운데 즐거움 있었고, 즐거워하는 가운데 근심 있었으니 │ 도산에 물러나 늦게 은거한 사람 진성 이공의 묘
8장 조선의 에토스
선생은 한 시대 유학의 종사이시다 │ 군자는 세상을 근심한다 │ 이황의 진득처는 우리의 터전이다 │ “이자수어”로 전승되는 이황의 학문과 삶
이황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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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서평
조선 성리학을 이끈 방향타이자 동아시아 주자학의 교과서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에 태어났다. 그다음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숙부 이우의 보살핌과 지도를 받았는데 숙부마저 이황이 17세 때 세상을 떠나면서 그 뒤로는 특정한 스승 없이 혼자서 공부를 이어갔다. 성균관에서 공부했으며 34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543년 『주자대전』 간행 시에 교정을 맡았으며 그 뒤로 『주자대전』을 새롭게 고증하여 그 주제를 정확히 규명하는 실증적 연구를 이어갔다. 특히 주희의 문집 전체를 통독한 뒤 『주자서절요』를 펴냈는데, 이 『주자서절요』는 당대 동아시아 주자학의 주요 교과서처럼 쓰였고, 이황의 이론은 이후 조선 이학을 이끄는 방향타가 되었다.
벼슬에는 큰 뜻이 없어 명종이 여러차례 불렀을 때에도 얼마간 조정에서 일하다가 다시 귀향하기 일쑤였다. 1567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응대하는 제술관에 임명되어 명 사신들에게 한반도를 대표하는 유학 지식인들(우탁, 정몽주에서부터 조광조와 서경덕에 이르기까지)을 소개했다. 뒤이어 선조 대에도 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서 일하며 당시 조정의 급선무를 정리하여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또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려 군주가 사적인 욕망을 자제하기 위해 일상에서 항상 성학(聖學, 성인이 되는 학문)을 갈고닦을 것을 당부했다.
이황이 유학 연구와 실천에 매진했던 때는 중국에서는 양명학이, 일본에서는 불교가 성행하던 때였다. 이황은 당시 유행하는 중국 양명학에 맞서 정통 주자학의 입장에서 인간의 본성을 해명하고 실천했다. 이황 이론의 핵심은 “선학(禪學)처럼 인륜의 마음을 깨닫고 각성하는 것이 아니라, 외물이 오면 응대할 수 있게 인륜의 이치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는 마음의 상태를 잘 견지하는 것”(18면)에 있었다. 이 내용을 담은 『연평답문』은 특히 일본에서 이학을 전파하는 데에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1555년 귀향한 뒤로 이황은 본격적으로 주희의 편지 중에서 여러 이론적 쟁점 및 정론이 되는 부분을 선별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주자서절요』와 『자성록』이라는 해설서를 펴냈다는 결과를 넘어, 이론을 실천으로 전환해내지 못하는 이황 자신의 내적 간극을 좁히는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다. 이처럼 지식을 축적함과 동시에 실천을 통해 인격의 성숙을 꾀하는 시도는 당대 동아시아 유학자들에게 절실히 다가왔고, 자연히 『주자서절요』와 『자성록』은 당대 유학자들의 주요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다.
이황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접한 『심경부주』를 통해 『심경』을 평생 수행의 지침으로 삼기도 했다. 이 또한 조선 유학자들의 또다른 지침이 되어, 이후 조선에서는 『심경』을 공부함으로써 이학의 심법(心法)을 실천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심경』은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요순의 마음과 같게 하는 성학(聖學)의 지침이 되고, 임금을 향해서는 요순 같은 성군으로 인도하는 격군(格君)의 지침이 되며, 백성을 위해서는 요순처럼 백성을 친애하는 안민(安民)의 지침이 되었다.”(20면)
이황은 유년 시절부터 이(理)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졌다. 12세 때 숙부에게 “무릇 사물에서 옳은 것이 이(理)인가요”라고 묻고 자신의 오랜 의문을 해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뒤이어 공부를 이어가면서 인간의 본성이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는 문제를 연구했다. 이 같은 성찰은 기대승과의 서신 왕래를 통해 8년에 걸쳐 논변으로 전개되었고,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사칠논변, 사단칠정논변이다. 특히 서경덕의 제자인 이구가 체(體)와 용(用)이 어떤 실체가 아니라 추상적 개념이라고 제기했을 때에 이황은 이(理) 자체가 구체적인 실체〔體〕이며 사물에서 발현될 때에 용(用)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사칠논변은 조선 후기 내내 유학자들에게 회자되며 유학 이론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단서가 되었다. 이황의 업적 중에서는 서원의 중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서원과 향약에 관련한 이황의 글 가운데, 그가 백록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했던 글과 이산서원의 학규, 역동서원의 건립을 기념하여 쓴 글, 향약조례, 그리고 향회에서 나이를 기준으로 자리를 정해야 한다고 밝힌 글 등을 뽑아 수록했다.
시대를 넘어 학파를 넘어, 조선 유학의 에토스가 되다
이황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 자신에 대한 과장된 평가를 막기 위해 직접 본인의 일생을 정리해두었다. 이 책에는 이황이 만년에 적은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비롯하여 「자명」 「고종기」 「유계」를 수록했는데, 이는 죽음을 맞이하는 대학자의 실제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현실의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학문을 즐기는 ‘지식인의 한 전형’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황을 ‘조선의 에토스’ 그 자체로 평가해도 손색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라는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나 최제우, 박중빈의 개벽사상 등으로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이황을 포함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 저자소개
저자 : 이황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 평생 이학 연구와 실천에 힘을 기울여 동아시아 이학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종사하다 일찍 물러나 서당을 짓고 이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계몽전의』를 편찬하여 이학을 밝혔고, 『연평답문』 『심경부주』를 활용하여 수신에 힘을 기울이면서 『자성록』을 남겼다. 만년에 조정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 등 정책과 학문 양쪽으로 선정의 방략을 건의했다. 문하에서 김성일·유성룡·정구·조목·이덕홍 등 후일 영남학파를 이룬 주요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기대승·성혼·이이 등 당대 조선의 학자들 대부분이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후 조선과 동아시아의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현대에도 계속 재성찰되고 있다. 별세 뒤 도산서원이 건립되어 향사되었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엮음 : 이봉규
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 조선시대 이학, 예학, 실학 연구자로 다수의 연구를 꾸준히 발표해왔다. 저서로 『조선시대 충청지역의 예학과 교육』(공저) 『다산 정약용 연구』(공저)가 있으며, 역서로 『예기역주5』 『명유학안 역주』(1~2권, 공역) 『정체전중변』(공역) 『다산의 경학세계』(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