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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티시 해리슨 워런의 서문 _탈기독교 시대에 울려 퍼지는 예언자적 목소리
엮은이의 글 _스탠리 하우어워스 읽기
Part 1.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 새로운 눈과 귀가 필요한 오늘의 제자도
01. 변혁적인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02. 때로는 풍랑 속에서 물 위를 걷는 일
03.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
04. 그리스도 이야기에 동참하기
05. 인간적 사랑만으로는 부족한 길
Part 2. 하나님 나라의 복음
―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열린 새로운 질서
06. 하나님이 가능케 하시는 불가능한 일
07. 팔복,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 주는 약속
08.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신 ‘온전함’을 바라볼 때
09. 기존 질서를 뒤엎는 하나님 나라의 의
Part 3. 세상 속의 교회
― 하나님의 대안적 사회로서의 교회 공동체
10. 교회, 하나님의 새 언어
11. 진실하게 말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며
12. 자선을 실천하는 공동체
13. 교회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가정
Part 4. 하나님 나라의 경제
― 나눔과 신뢰로 사는 법
14. 부와 부자에 대한 성경적 시각
15. 불의하고 불공정한 현실 속에서
16. 이웃의 필요에 대한 우리의 책임
17.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
Part 5. 십자가로 이루는 평화
― 폭력의 세상에 화해의 씨앗 뿌리기
18. 거짓 평화를 깨는 용기
19. 칼 대신 십자가를 지니고
20. 비폭력의 길, 위험이 따르는 모험
21. 상상력의 해방, 전쟁 없는 세상
Part 6. 증언의 정치
―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 내는 교회
22. 교회의 첫 번째 과제, 교회가 되는 것
23. 세속 정치 질서를 뛰어넘는 예수의 왕권
24. 탈기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정치
25. 그리스도가 만드신 차이
출처
참고 문헌
[본 문]<24-25쪽, 티시 해리슨 워런의 서문 중에서>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회개하고 거듭나는 것이 언제나(지금도) 가능하다는 것도 내게 상기시켜 준다. 사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듯이, 교회가 서구 사회에서 지위와 인기를 빠르게 잃고 있는 이 탈기독교 시대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재발견할 최적의 시기인지도 모른다.
남편과 나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탈기독교 세계(post-Christendom)이자 기독교 이전 상태(pre-Christian)”로 자주 묘사하곤 한다. 이는 사람들이 복음을 새롭게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암시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 마음과 우리 이웃, 친구들, 다른 교인들의 마음을 찾고 계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적 서구 사회’라는 망상이 사라지고, 종교와 무관하다고 밝히는 이들이 늘어 가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랫동안 복음을 규정하고 왜곡해 온 체면, 권력, 정치적 예속, 민족주의의 덫에서 벗어나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삶을 드릴 가치가 있을 만큼 초대형 프로젝트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예수님의 길을 찾고 그분이 세우시고 사랑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를 이끄는 데 중요한 목소리를 계속해서 내고 있다.
<34-35쪽, 엮은이의 글 중에서>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다. 그분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현실을 현재로 만드시고, 교회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적 가능성을 불러일으키신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무력화되었다. 십자가는 우리가 세상을 바로잡을 필요도, 번영과 권력의 명령을 따를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십자가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강압적 무력으로 세상을 구원하기를 거부하셨다. 그러니 우리도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고난을 감내하심으로써, 우리를 죽이려는 자들을 죽이지 않고도 세상 속에서 살아갈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따라서 세상과 교회의 차이는 단지 가치관이나 수단의 차이가 아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 차이는 ‘예수님’이다. 그래서 교회의 최우선 과제는 교회가 되는 것, 곧 자기 삶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 창조를 증언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는 교리적 움직임이 아니라 정치적 움직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죽일 수 없기에 정치가 필수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평범한 정치가 아니다. 타인과 낯선 사람을 환대하는 정치, 원수를 인내하며 견디는 정치, 상처 입고 억압받은 자들을 돌보는 정치, 진실한 평화의 정치다.
<45쪽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거나 다르게 이해하게 되는 정도의 사안이 아니며, 영적인 존재가 되거나 교회에 출석하는 문제도 아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메시아, 곧 주(主)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자신의 삶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고백하는 분, 우리가 충성을 다 바치는 대제사장이자 왕이신 분을 반영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며(고후 5:16-17), 변화되어 예수님이 시작하신 새 시대의 빛 가운데 걸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초대하신다. 그 역사는 우리의 세상을 뒤흔들며, 동시에 하나님이 세상과 어떻게 화해하고 계신지를 보여 준다. 예수님의 생애 이야기는 단순히 그분의 삶을 보여 주고 가르침을 기억하게 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며, 그분과 우리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훈련시킨다.
<62쪽 중에서>
복음은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사랑이나 사랑 윤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붙들라는 부르심이다. 그분은 우리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결합하시고 우리 삶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드신다. 복음을 사랑의 윤리로 만들어 버리면 그것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사랑이라는 말의 내용을 우리 뜻대로 채우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 그 이야기는 우리를 변화시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한다.
<90쪽 중에서>
그분의 명령은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법 조항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고안된 상징적인 은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예수님의 요구는 우리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데, 이는 단지 도덕적 실천을 촉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늘 들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보도록 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과거의 이미지를 더는 의지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101-102쪽 중에서>
오순절이 예시한 인류의 하나 됨은 그냥 아무 연합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종말론적 사역으로 가능해진 연합이다. 이 하나 됨은 경계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한데 모으며 새로운 이해를 불러온다. 그런데 이는 다른 언어의 존재를 부정하는 인공어 에스페란토어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단일 정치 체제나 기술 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단일 언어를 만들어서 공동체를 세우려는 시도는 타인을 타인으로 이해함으로써 성령이 이루신 하나 됨을 찾으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역사와 다름을 잊어버리게 하려는 시도다.
오순절에 하나님은 새 언어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아니라 돌봄(care)이 육화된 언어다. 그것은 불의 세례이며, 우리는 이 세례를 통해 구세주에 대한 기억이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공동체, 곧 서로의 다름이 오히려 연합과 사랑에 기여하는 백성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이 새로운 창조를 ‘교회’라 부른다.
<125쪽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통해 부부는 평생 정절을 지키고, 자신들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성도이기 이전에 죄인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모험은 당신이 결혼한 상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 가는 것이다.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한 다음에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결혼을 통해 사랑이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모험인지를 배운다.
<173-174쪽 중에서>
복음서에 ‘원수를 용서하라’거나 ‘한쪽 뺨을 친 자에게 다른 뺨도 돌려 대라’처럼 비폭력을 암시하는 듯한 본문은 있지만, 신약성경 어디에도 철저한 평화주의자가 되라고 말씀하는 직접적인 명령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비폭력을 원칙이나 궁극적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비폭력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처럼 비폭력을 전략으로 삼을 때 그것은 강압의 또 다른 형태가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비폭력적인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는 그들이 다른 이야기(내러티브)에 합당하게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따르기 때문이다(요일 2:6).
비폭력에 관한 설명들이 비폭력적 삶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인정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 비폭력적 삶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이유가 있어서 고난을 받는데, 제자도는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려는 이들에게 그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취할 준비가 아니라 스스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의 무장을 해제하셨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는 모든 이들의 무장을 해제하신다.
<191쪽 중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골칫거리 사회에 제공해야 할 가장 흥미롭고도 창의적인 정치적 해결책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법도, 정책 입안자들에 대한 조언도, 사회 프로그램을 위한 기금 마련도 아니다. 물론 때로는 이런 방법으로 후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제공해야 할 가장 창의적인 사회적 전략은 바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강제나 정부의 조치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세상에 보여 준다. 세상이 아닌 다른 곳, 곧 하나님이 낯선 사람들로 가족을 이루시는 곳을 보여 줌으로써 세상을 섬긴다.
<202-203쪽 중에서>
사람들이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의제가 세속 보수주의자들의 정치 의제와 너무나도 비슷해 보이고,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진보주의자들과 같은 사회적 입장을 지지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세상 속’에 존재하기 위해, 적실성을 잃지 않고 주목받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교회는 ‘세상에 속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제 교회는 모호한 종교적 색채만을 살짝 띤 관습적인 정치적 견해를 따분하게 주장하는 존재가 되었다.
좌파든 우파든 정치 신학은 대체로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그 안에서 교회는 때로 불평하기도 하지만 결국
에는 국가를 돕는 유익한 버팀목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교회는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진척시키는 그분의 비전이 기존 권력에 달려 있다고 간주한다. 여기서 기독교 세계가 저물어 가는 것은 교회에 유익하다. 공공 광장에서 기독교가 사라진 것을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한탄하지만, 사실은 국가의 여러 버팀목 중 하나로 국가에 봉사하려 할 때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보여 줄 자유를 되찾을 기회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넓은 사회에서 지위와 권력을 잃을 때 그 상실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 더는 잃을 게 없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기꺼이 살 수 있다. 통제하려 하거나, 통제 수단을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