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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관하여 - 시몬 베유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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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서문

 

주의

탈창조

빈자리

고요

아름다움

아픔

무위

 


[본 문]

오늘날 종교가 처한 위기를 단순히, 특정한 믿음 내용들이 타당성을 상실한 탓으로, 우리가 더는 신을 믿지 않는 탓으로, 또는 교회가 신뢰를 상실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구조적인 이유들이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이유들이 신의 부재를 일으킨다. 한 가지 이유는 주의(注意)의 몰락이다. 종교의 위기는 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보기와 듣기의 위기인 것이다. 신은 죽지 않았다. 과거에 신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냈는데, 신의 드러남을 마주할 인간이 죽었다. _11-12

 

종교적 주의는 추구하기가 아니라, “달라붙기가 아니라 바라보기.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손을 펴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도 움켜쥘 수 없는 열린 공간을, 달라붙기를 허용하지 않는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다. _15

 

깊은 주의로서의 기도가 향하는 상대는 우리를 중독시키지 않는다. 우리에게 달려드는 대신에 부재를 향해, 처분 불가능성을 향해 물러난다. 신은 부재함으로써 빛난다. “신은 피조물 안에 부재의 방식으로 임()할 수밖에 없다.” _18

 

우리는 겨냥한 바 없이 기도문을 왼다. 신 앞에서 우리 자신을 연다. 가장 아름답고 높은 기도는 바라는 바 없는 경청, 신의 침묵 속으로 파고드는 경청이다. _18-19

 

선은 간접적이고 불연속적이며 수줍은 반면, 악은 달려든다. _20

 

우리는 주의 깊게 읽지 못한다. 독해력 결핍만으로도 우리는 신에게서 멀어진다. 깊은 주의가 없으면 읽기는 중력에 종속되고, 중력은 읽기를 눈멀게 하여 참된 질서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_26

 

주의 깊은 바라봄은 자연적 바라봄이 아니라 초자연적 바라봄이다. 이 바라봄은 권력의 경제를 초월한다. 사랑하는 바라봄, 우호적인 바라봄이다. 타인에게 주의를 선사하는 사람은 자기를 절제한다. 주의 깊은 바라봄은 나를 나의 존재로부터 소외시키지 않는다. 도리어 내가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해준다. 나를 점령하는 대신에 나를 도와 존재에 이르게 한다. 타인의 주의 깊은 바라봄은 초자연적 바라봄으로서 구원하는 바라봄이다. 이 바라봄은 평가하지도 않고 최종 판결을 내리지도 않는다. 이 바라봄은 원죄가 아니라 은총을, 나를 떨어뜨리는 대신에 해방하고 들어 올리는 은총을 상기시킨다. _30-31

 

주의는 선물, 순수한 증정품이다. 주의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주의는 비대칭적 면모를 띤다. 반면에 대칭으로서의 경제는 우리에게서 너그러움을 앗아간다. 타인을 향한 주의는 윤리 그 자체다. _40

 

우리가 신을 사랑하여 자기를 포기할 때, 창조가 완성된다. “창조의 초월적 완성으로서의 탈창조는 신 안으로 소멸하기. 탈창조는 소멸한 피조물에게 존재의 충만함을 준다. 사랑에 기초하여 기꺼이 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파멸하기가 아니라 더 높은 실재로 상승하기다. _51

 

종교가 처한 위기의 구조적 원인으로 주의의 쇠퇴와 더불어 대폭 강화된 자아를 꼽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주의는 오로지 자아 주위를 맴돈다. 우리는 충성스럽게 자아를 숭배하고 예배한다. 누구나 자기를 섬기는 사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자기를 섬기는 사제란 자기를 부리는 사업가를 뜻한다. 누구나 자기를 생산하고 자기를 공연한다. 요란스러운 자아는 신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는다. _53-54

 

참된 실재, 참된 질서는 오로지 나를 완전히 꺼버릴 때만 경험된다. 구속은 어떤 구속이든지 실재를 왜곡한다. 내가 물러남으로써, 나를 철회함으로써, 나를 취소함으로써, 나는 사물들에게 왜곡되지 않은 실재성을, 아름다움을 되돌려준다. 탈창조가 창조를 해방한다. _57

 

베유의 견해와 달리, 기쁨의 참된 원천은 한순간 번득이는 과거가 아니라 순간 자체다. 우리가 어떤 곁눈질도 없이 온전히 순간에 거주할 때, 우리는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찬다. 우리가 기쁨을 얻는 것은 미래 때문도 아니고 과거 때문도 아니다. 미래는 염려(Sorge). 순간은 기쁨이다. 우리가 순간에 완전히 녹아들 때, 내다보지도 않고 돌아보지도 않을 때, 우리는 영원을, 순수한 기쁨을 경험한다. _59

 

디지털 과도(過度) 소통은 고요를 파괴한다. 정보는 그 자체로 소음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정보로서 지각한다. 그리하여 정보 및 소통 쓰레기가 세상을 소음으로 뒤덮는다. 소음으로서의 정보는 주의를 깨부순다. 오직 관조적 주의만이 고요에 접근할 수 있다. 영혼을 공격하는 정보 및 소통 소음은 근대의 기계 소음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다. 정신이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거나 수용할 수 있으려면, 고요가 필요하다. 창조의 장소는 고요하다. _89

 

그녀는 불행을 영혼의 가장 깊은 중심에 갖다 댄 못에 비유한다. 못대가리를 힘껏 때리면, 충격이 뾰족한 끝으로 전달돼 영혼에 구멍이 난다. 베유가 말하는 아픔의 변증법의 핵심은 이 구멍이 신에게 도달하는 통로로 밝혀지는 것이다. 극심한 아픔으로서의 불행은 영혼과 신을 갈라놓는 장벽에 구멍을 낸다. 신을 향한 사랑은 아픔과 불행의 절대적 부정성 앞에서 비로소 깨어난다. 부정성이 없으면 신을 향한 상승도 없다. _122-123

 

디지털 올가미는 시몬 베유가 자신을 옭아맨다고 느꼈던 저 기계적 올가미보다 더 강력하다. 디지털화는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지만 결국 파놉티콘 감옥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데이터 뭉치로, 감시당하고 조종당하는 데이터 가축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디지털 콘텐츠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의 주의를 산산이 깨부수는 자극에 중독된다. 결국 종착점은 중독사회다. 자유는 검색에 밀려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스스로 믿지만 실은 한 중독에서 다른 중독으로, 한 의존에서 다른 의존으로 휘청거리며 옮겨간다. _134

 

시몬 베유는 간결하게 말한다. “, 기계화, 대수학. 현대 문명의 세 괴물.” 이 괴물들은 순수한 양이다. 높이와 깊이는 깡그리 근절된다. 그리하여 같음의 지옥이 도래한다. “대수학과 돈의 유사성. 양쪽 다 같게 만들기를 한다. 돈과 대수학의 세계에서 수직 거리는 표현되지 않는다.” 베유가 말하는 돈, 기계화, 대수학을 현재에 맞게 갱신할 필요가 있다. 현재 문명의 세 괴물은 자본, 디지털화, 인공지능이다. 이 괴물들은 인간을, 정신을 양과 효율의 노예로 격하한다. 우리는 또다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의 노예가 된다. _139-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