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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소개
어떤 ‘말’로 시작된 그날의 밤은 우리의 두 계절을 집어삼켰다. 새해의 광명도 봄의 따스함도 느낄 새 없이 우리는, 말의 위력에 무력한 채 “상상을 초과하는 수많은 말”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갑작스러운 말이 초래한 공격 속에서 말들은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냈다. 한순간에 얼어붙어 냉기만을 내뿜는 터널 속에서 한 손에 쥔 빛과 서로가 만든 온기로 기어코 봄의 조각들을 쟁취했다. “휘발성이 높고 실시간으로 유통되는 그 말들이 일순간 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된 시대.” 계간 『자음과모음』 2025 여름호는 지금을 이렇게 정의하며, ‘말’에 함의된 이전과 다른 의미와 ‘말을 씀’으로써 발화되는 영향, 그리고 말의 주체인 우리의 감각에 대해 다룬다.
범람하는 말 속에서 이를 대하는 우리의 감각이 달라지고 있는 지금을 포착하는 것이 ‘말’을 ‘글’을 ‘씀과 쓰임’을 다루는 문예지의 역할과 책임이라 여기는 바다. 지난한 봄을 지나 여름에 당도한 우리에게 새로운 계절, 비로소 시작이란 결실을 ‘말’과 ‘씀’으로써 건넨다.
목차
머리글
신예슬 말함으로써, 씀으로써
크리티카: 말 씀
박권일 ‘아무 말’의 시대를 건너는 법
유승민 광장의 언어가 우리에게 남긴 감각
장한길 몸과 침묵, 말의 사후
배주영 ‘아무 말’이 콘텐츠가 되는 세상을 허할 것인가― 웹소설의 ‘아무 말’에 대한 고찰
문학상 발표
제8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
제15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제2회 이지북 YA! 장르문학상
제2회 이지북 고학년 장르문학상
시
강지수 1 FREE SODA 외 1편
김뉘연 이 사람 외 1편
김지은 골든샤워Urolagnia 외 1편
여세실 나무말미 외 1편
장혜령 포르노그래피 복제 시대의 서정시 외 1편
전욱진 포도와 나 외 1편
최정진 아이가 울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외 1편
단편
김성중 수술 소설
김희재 우리는 한때 같은 성에 살았고
안톤 허 화가의 미래
정미래 시트론 느와르
장편
이장욱 켄의 행방
에세이
김홍중 로셀리니와 시몬 베유
이지훈 삶이 남긴 상처들
황휘 너의 전생은 흐린 눈 이미지 도둑
작가: 김병운
노태훈 작가론: 픽션의 용기와 멀리 가는 퀴어―김병운론
김병운 에세이: 요즘 나는 무엇을 쓰든 너무
역: 번역가의 방
정새벽 하찮은 시의 하찮은 번역가
평: 해외문학
이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사소함의 수사―가족주의를 넘어선 욕망과 친절
시소
송현지 · 최다영 현전하는 ‘우리’의 가능성
단요 · 박인성 냉소주의의 뒤편에, 숨은 신의 시선이
독: 봄의 책
김다솔 인간을 다시 쓰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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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공모
책 속으로
오늘날 한국 반지성주의의 특징적 형태는 ‘서사 과잉narrative excess’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서사라는 담론 양식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과도하게 흘러넘친 상태를 가리킨다. 즉, ‘비非서사’의 세계를 서사가 침범하는 상황이다. 회의론자는 밝혀진 사실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하고 하나의 가설에 대한 합리적 반증이 나오면 즉시 가설을 폐기한다. 반면 ‘음모론자’ 혹은 ‘서사 중독자’들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그럴
듯한 이야기’ ‘극적인 서사’에 끊임없이 매료되기 때문에 그 서사에 부합하는 사실만을 수집해 더욱 근사한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 열중한다. 반증이 나오면 자기 가설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그 반증이 자기 가설을 더 강화한다고 주장하거나 음모의 흑막이 증거를 ‘세탁’했다고 강변한다. 따라서 이들은 패배를 모르며 언제나 승리한다.
--- 「박권일, ‘아무 말’의 시대를 건너는 법」
광장의 언어가 우리에게 남겨준 건 ‘감각’이었다. 인파로 가득 찼던 풍경도, 하늘을 수놓던 깃발도, 울려 퍼지던 목소리도 이제는 자취를 감췄지만 그 흔적만큼은 몸이 기억하는 감각으로 남았다. 낯선 이와 마주할 줄 아는 감각. 원색적인 표현 없이도 불편함을 드러낼 줄 아는 감각. 듣는 이의 마음을 살필 줄 아는 감각. 내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감각. ‘우리’가 함께 살아갈 공동체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그려보는 감각. 이러한 감각이 살아 있는 한, 언어가 지닌 선함 역시 계속해서 살아남을 것이다.
--- 「유승민, 광장의 언어가 우리에게 남긴 감각」
침묵의 미래」는 디스토피아를 그리며 끝나지만, 현실에서는 말이 사멸한 뒤에도 사람들이 살아간다. 사멸한 언어공동체의 살아남은 후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편입된 (대부분 식민지 종주국) 사회의 언어를 모어로 하게 된다. 하지만 서경식처럼 그들이 그렇게 배운 자신의 모어를 ‘감옥’으로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과연 소설과 현실 중 어느 쪽이 더 암울한 것일까. 작중 소수언어박물관에서 태어나 밖으로 떠나보내진 아이가 자신의 출신을 알게 되면 ‘중앙어’를 감옥으로 인식하게 될까? 국적과 모어가 일치하는 내가 쉽사리 이야기하기엔 무리일 것 같다.
--- 「장한길, 몸과 침묵, 말의 사후」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 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 「노태훈, 픽션의 용기와 멀리 가는 퀴어--- 「김병운론」
독자를 만난 순간 내 소설이 더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내가 쓴 소설과 독자가 읽은 소설이 결코 같은 것일 수 없으며, 감상은 그 자체로 고유하므로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알고 있어도, 그 모든 것에 전적으로 동의해도, 나는 내 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만큼 좀처럼 무덤덤해지지가 않는 것 같다. 그렇구나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있지도 안 되며, 그러든지 말든지는 더더욱 안 되는 것 같다.
여전히 한마디에 하늘을 날고 땅으로 꺼진다. 여전히 거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여전히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문다.
--- 「김병운, 요즘 나는 무엇을 쓰든 너무」
시인은 침묵해야 할 때 말하고, 눈감아야 할 때 본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는다. 표어로 덮으려는 감정의 밑바닥을 파헤치고, 허락된 언어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침묵의 금을 가볍게 넘기 때
문이다. 시인은 ‘하찮은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하찮음―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체제에 기여하지 않는, 분류되지 않는 자아의 목소리―이 가장 근본적인 저항이 될 수 있다. 그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 「정새벽, 하찮은 시의 하찮은 번역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흔히 책임과 양심의 문제로 다뤄지는 도덕적 행동을 욕망과 쾌락
의 지형 속에서 재구성하는 시도라 할 만하다. 작품은 디킨스식 전망과 디킨스식 황량함을 함께 이어가되, 사회 차원에서든 개인 심리 차원에서든 어둠과 불안의 음영을 더욱 짙게 함으로써 현대성을 담보한다. 1980년대 아일랜드의 만성화된 체념과 마비 상태가 신자유주의적 레짐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삶의 풍경과 닮아 있음은 물론이고, 반면에 그 못 견딜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고 실천하는 정동의 짜릿함이 갖는 전이력 역시 결코 약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키건은 그 짜릿함을, 배회 끝에 드디어 먹잇감을 발견한 “야행성 동물”의 “흥분”에 견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출판리뷰
말의 새로운 감각을 아로새긴 채 ‘아무 말’의 시대 건너기
『자음과모음』 이번 크리티카에는 말들의 구조와 움직임을 추적하는 네 편의 글이 실렸다. 미디어사회학자 박권일은 ‘탈진실 시대’의 말들을 기만과 음모론, 개소리로 분류하며 그 말들을
대하는 우리의 인지적 조건을 예리하게 들여다본다. 인지언어 연구가 유승민은 광장의 말들, 처단의 언어가 아니라 지켜내는 언어들을 소개하며 광장에서의 말들이 어떤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는지 살핀다. 한편 사운드 작가 장한길은 말의 보존과 말의 절멸에 대해 쓰며 생생한 말들이 어느 순간 어떻게 빛을 잃게 될지 생각하게 한다. 스토리텔링 연구자인 배주영은 웹소설 매체에서 ‘아무 말’이 콘텐츠로 전환되고, 그 아무 말이 때로는 엄중한 계엄의 현실까지 가닿았던 현상을 짚는다.
2025 여름, 자음과모음이 선택한 얼굴들
미디어아티스트 ‘김아영’, 먼 곳을 향하는 서사를 쥔 ‘김병운’
이번 호 [담: 인터뷰] 지면에는 미디어아티스트 김아영을 초대했다. 문학적 미술을 행하는 그를 더욱 깊이 있게 담기 위해 음악평론가 신예슬과 문학평론가 김보경이 나섰다. 사변적 픽션이라는 개념 아래 전개되어온 김아영의 작업들과 그 이면에 있던 문학의 영향을 충분히 더듬어볼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본지만의 시선으로 선정한 작가와 작가론을 만나는 지면 [작가]의 이번 호 주인공은 소설가 ‘김병운’이다. 노태훈 평론가가 김병운의 텍스트를 폭넓게 살피며 소설 속 ‘나’와 김병운의 존재를 세심히 관찰하는 작가론을 펼쳤다. 김병운은 에세이를 통해 매일 쓰며 살아가는 소설가의 마음속에 머무르는 생각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좌절을 반복하면서도 시의 혼령을 불러들이는 정새벽
고전성에 달라붙은 불안과 어둠의 깊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언어의 넘나듦’을 담은 코너 [역: 번역가의 방] 여름호 주인공은 정새벽이다. 번역하는 자신의 마음과 비물질적 ‘혼령’처럼 번져나가는 시의 힘에 대해 쓰며, 역사의 진공 속으로 사라진 한국 시인들의 목소리를 지키고자 하는 다짐을 드러냈다.
[평: 해외문학] 지면은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해 조명한다. 영국 소설과 비평 이론을 전공한 이현이 소설 속에 드러난 사소함의 수사를 단정한 문장들로 되짚는다. 소설을 읽은 이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것이다.
긴 호흡, 다분야의 비평과 처음 태어나는 작품들
새롭게 시작하는 장편 연재 이장욱의 『켄의 행방』
『자음과모음』만의 계간평 [시소]는 봄에 이어 송현지-최다영(시), 단요-박인성(소설) 평론가가 지난 계절 발표된 작품들을 두루 살폈다. 두 계절 동안 이어진 그들의 밀도 높은 대화를 따라 읽는 시간은 큰 즐거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지난 계절 발행된 단행본 리뷰 코너 [독: 봄의 책]에서는 평론가 김다솔이 다섯 권의 책(『칸트와 푸코―비판, 계몽, 주체의 재구성』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 『불새』 『나의 모험 만화』『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을 통해 “인간을 다시 쓰는 이야기들”을 펼친다.
작품란에는 강지수 · 김뉘연 · 김지은 · 여세실 · 장혜령 · 전욱진 · 최정진의 시인의 시, 김성중 · 김희재 · 안톤 허 · 정미래 소설가의 단편소설이 지면을 빛냈다. 이번 호부터 시작되는 이장욱 소설가의 장편소설 『켄의 행방』 연재에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에세이 코너는 사회학자 김홍중, 웹소설 작가 이지훈, 음악가 황휘가 저마다의 사유로 지면을 아름답게 채웠다.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 · 신인문학상,
이지북 YA! 장르문학상 · 고학년 장르문학상 발표
이번 여름호에는 네 개의 문학상 발표가 이루어진다. 제8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으로 강지구의 『인디카』가, 제15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박우연의 「강 건너의 얼간이들」이, 제2회 이지북 YA! 장르문학상 우수상으로 서하나의 『백색 인형』이, 제2회 이지북 고학년 장르문학상 대상으로 오홍선이의 『록키즈 추리 대회』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자음과모음과 함께 더 넓은 무대로 나아갈 신규 작가들을 축하해주시고, 앞날을 기대해주시길 바란다.